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望草亭/南道別曲

38년전 나의 첫 직장은 석탄 광산이었네

by 南道 2008. 4. 3.

아들이 취업하여 집을 떠난 지 한 달이 되었다.

아들의 직장이 경북 구미인데 진주에서 승용차로 두 시간 정도 거리이다.

어린아이 같은 아들을 보내고 아내와 나는 늘 노심초사 걱정이 태산이다.

공장일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아들이 하는 일이 눈에 선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내 걱정은 기우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아들은 이미 대한민국 국군으로 군대에도 다녀왔고 나이가 스물 일곱이나 되었다.

 

나는 열아홉 어린 나이에 광산에서 험한 일을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벌써 3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나는 지금으로 부터 38년 전인 1970년 석탄을 캐는 광산회사에 취직하였다.

군 입대 할 때까지 전기공으로 2년 정도 일을 한 잊지 못할 추억을 가지고 있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 다닌 직장이고 내 손으로 처음 돈을 벌었던 곳이다.

내가 다닌 광산은 강원도 태백시에 있었던 함태 광업소라는 민영 탄광이다.

종업원이 3,000명 정도 되는 대규모 석탄 광산이었지만 지금은 폐광되었다.

 

지금은 대부분의 가정에서 기름 보일러나 가스 보일러를 사용한다.
그러나 40여 년 전에는 거의 대부분의 연탄을 연료로 사용하였다.
그 때문에 광산의 경기가 좋았고 농촌을 떠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40여 년 전 광산촌은 빼곡히 들어선 광산 사택이 있었다.


석탄 광산의 광부들은 하는 일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되었다.
석탄이 매장된 곳까지 갱도를 만드는 굴진부가 있고
실제 석탄을 캐는 채탄부가 있다.
보통 4~5 명을 1 개조로 작업을 하는데 조장을 선산부라고 한다.

석탄을 캐는 작업 조원은 후산부라고 하였다.

나는 전기공으로 직접 석탄을 캐지는 않았지만 전기시설을 보수하는 일을 하였다.
지하 수백 미터 , 수천 미터를 갱도를 따라 들어가면 많은 시설들이 있었다.
주로 물을 퍼 내는 펌프장, 공기를 넣어주는 송풍기, 착암기에 압축공기를 공급하는

컴프레서, 경사진 곳에서 석탄이나 갱목을 운반할 때 사용하는 권양기 등이 있었다.


나는 선배들을 따라 수 천 미터 지하 깊은 갱 안에서 많은 일을 하였다.

당시 50세쯤 되는 선배들은 일제시대 일본 사람에게 기술을 배웠다고 자랑하였다.
컴컴한 지하에서의 작업은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지만 그 때는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월급 타서 어머니께 드리고 우리 집 형편이 조금씩 펴지는 게 얼마나 좋았던지.
내가 돈을 벌어서 아버지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 드린다고 생각하였다.
2 년 동안의 광산 생활은 내 인생의 큰 사건이었고
이후 세상을 살아가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눈을 감으면 당시 광산의 모습들이 영화처럼 머리를 스쳐간다.

출근 때 광부들을 태운 통근버스가 10대 이상 회사로 들어오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광부들은 대부분이 외지 사람들로서 전국 방방 곡곡에서 모여들었다.
대표적인 광산촌은 태백시의 황지, 장성, 철암과 정선군의 사북, 고한,

삼척시의 도계 등 주로 태백산과 함백산 주변에 집중되어 있었다.

깊은 산속의 광산에서 캐낸 석탄은 인근의 기차역으로 운반한다.
운반 수단은 화물차, 소형 괘도 열차, 케이블 카 등이 이용되었다.

당시 내 친구 중에는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졸업하고 화물차의 조수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공고 전기과를 다닌 덕분에 전기공이 되었는데 내 친구들 중에서 유일한 고졸이었다.

 

작년에 태백산 등산길에 보니 광산은 완전히 정리되고 대규모 관광단지가 조성되었다.
태백시 당골에 석탄 박물관이 있어서 이곳에 광산이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다니던 함태광업소 자리는 쓸쓸하게 공터로 남아 있었다.

 

2007년 8월 태백산 등산하며 보았던 함태광업소 옛 터 사진...

 

                                                                                                                             

태백시는 잊을 수 없는 마음의 고향이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내 마음은 언제나 그 시절을 잊지 못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38년 전 열아홉 어린 나이에 광산에 다니던 나의 모습이다.

광산에 다니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너무 먼 옛 추억이 되었다.

 

 

 

이제 공장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한 아들도 잘하리라 믿습니다.

다니던 4년제 대학을 버리고 취업을 위해 2년제 대학을 다시 들어간

아들의 용기와 선택이 있었기에 오늘 이렇게 취업하게 되었습니다.

 

주말이면 혹시 아들의 빨간 차가 보일까?

나도 모르게 골목길을 기웃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세월은 나를 이렇게 아버지라는 자리로 밀어 올렸습니다.